문제의 발단
마태복음 19장은 예수님이 바리새인들로부터 이혼에 대한 질문을 받고 답변하신 내용을 담고 있다. 여기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마 19:3)
라는 물음이다. 새번역에서는 이 부분을 “무엇이든지 이유만 있으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라고 번역했는데, 이게 왜 시험이냐 하면, 만약 예수님이 어떤 이유로든 결혼한 남자가 그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된다고 하면,(그러니까 이혼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 모세가 기록한 율법에 이혼할 수 있도록 한 이혼법이 있는데, 그럼 그걸 부정하는 거냐…… 하고 예수님에 대해서 율법을 무시하는 반율법주의자로 낙인을 찍을 수 있기 때문이고, 또 그 반대로 만약 어떤 이유가 있어서 남자가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가능하다고 답하면, 당시에 무분별하게 이혼증서만 써 주면 이혼이 손쉽게 되었던 풍조를 따른다는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당시에 남자들이 결혼 생활에 싫증이 나면 종종 모세의 이혼법을 이용해서 사소한 이유로 아내를 버리는 풍조가 만연했기 때문인데, 당시 엄격한 율법주의 바리새파 사람들은 이런 세간의 풍조를 비판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혼을 할 수 있다고 답하면 이런 당시의 무분별한 이혼 풍조를 따른다고 비난할 참이었던 것이다.
이 양다리 함정을 파 놓은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모세의 이혼법의 근본 취지, 그러니까 율법의 표면적인 법조문의 이면에 담겨 있는 법정신을 일깨워주시는 답변을 하게 된다.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 19:4-6)
예수님의 답변을 뜯어보면 이런 것이다.
먼저 예수님은 창세기에 기록된 남녀의 결혼의 원리를 말씀하신다. 그러니까 결혼에 대한 창조주의 의도는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여 한 몸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결혼한 부부는 인위적으로 이혼해서는 안 된다는 대원칙을 환기시켜 준다. 문제는, 이런 대 원칙이 있는데 그럼 왜 모세는 이혼을 허용하는 율법을 도입했는가 하는 바리새인들의 추가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은 그 배경을 이렇게 설명하신다.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마 19:8-9)
그러니까 모세가 이혼을 허용한 것은 하나님의 원래 의도가 아니라 타락한 인간의 완악함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때문에 간음한 연고 외에 이혼의 구실을 붙여서 이혼하는 것은 모세의 이혼법의 그 원래의 취지에 어긋난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이 답변에 대한 취지를 이해하려면 당시의 문화적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어떤 거냐면, 당시 이방의 풍습은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했기 때문에 남자들이 여자를 소유물로 여기고 적당한 구실만 있으면 아내를 구두로 (말로) 내쫓아버리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났다고 한다. 출애굽 당시에 이런 이방의 나쁜 풍습을 이스라엘 백성들도 광범위하게 따라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모세는 남편들이 아내에게 어떤 구실을 붙여서 비난거리로 삼을 경우 성읍의 장로들에 보이도록 해서 공동체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는 규정을 두었고, 또 이혼을 할 경우에는 구두 통보가 아니라 공인된 증서를 통해서 할 수 있도록 했다. 신명기 22장과 24장에 이런 규정들이 언급되어 있는데, 한마디로 모세의 이혼법은 이혼을 장려하는 법이 아니라, 오히려 무분별하게 이혼하는 것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조처였다…… 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남자들의 전횡을 막고, 여성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었던 셈이다. 이런 점에서 모세의 이혼법은 당시 고대 사회의 여성이 억압받던 시대상에서 볼 때 매우 혁명적인 사상이었다. 물론 모세의 이혼법이 당시 혁명적인 사상일 수 있었던 것은 모세 자신의 생각이 혁명적이어서가 아니라 시대를 초월한 진리로서의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졌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모세 당시의 이혼법이 세월이 흘러가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법정신이 퇴색되어 갔다. 그래서 모세 이후에 이미 세월이 천 년 정도 흐른 예수님 당시에는 남자들이 도리어 모세의 그 이혼법을 악용해서 합법적으로 이혼하는 사례가 늘어났는데, 그러니까 남자들이 아내가 싫증나면 어떤 구실을 붙여서라도 이혼 증서를 써 주기만 하면, 버젓이 합법적인 이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런 방식으로 이혼이 횡행했던 것이다.
당시의 이런 정황이 있었기 때문에 율법에 엄격했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의중을 떠 보기 위해서 이혼 문제를 질문한 것이다. 만약 예수님이 이혼이 안 된다고 말하면 모세의 이혼법이 있는데 왜 안 되냐고 시비를 걸려고 했던 것이고, 만약 이혼이 된다고 하면 당시의 이런저런 구실로 이혼증서를 써 주기만 하면 합법적으로 이혼이 난무했던 풍조에 편승한다고 비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먼저 창세기에 기록된 하나님의 남녀 결합의 원리를 언급한 후에 정확히 모세가 왜 이혼법을 만들 수밖에 없었나……. 하는 그 근본적인 입법 취지를 알려줌으로써 바리새인들의 시험을 물리치신 것이다. 말하자면, 바리새인들은 이혼이라는 이슈를 율법의 표면적인 잣대에 비추어 흑백논리로 접근해서 예수님을 골탕먹이려고 한 건데(이것을 논리학에서는 '거짓 딜레마의 오류'라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세의 그 이혼법의 표면적 준수 여부를 따진 것이 아니라, 그 이면의 법정신을 환기시켜 준 셈이다.
그런데 이런 예수님의 답변, 그러니까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는 말씀에 대해서, 이번에는 제자들이 나서서 그렇다면 차라리 결혼하지 않는 것이 낫지 않느냐는 약간 자조적인 추가 질문을 한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의 엉뚱한 질문에 대해서, 누구나 결혼을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그러나 특별히 타고난 사람은 결혼하지 않는 것이 가능하다는 취지의 말씀을 하시면서 3가지 경우를 들고 있다.
성적 지향에 대한 언급
마태복음 19장 11절에서 12절에서 언급된 예수님의 말씀을 한번 보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람마다 이 말(결혼하지 않는 것)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마 19:11-12)
이 말씀 속에는 예수님의 성적 지향에 대한 견해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인데, 그러니까 예수는 결혼하지 않을 수 있는 성적 지향을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고 말씀하시면서 3가지 경우를 들고 있다. 그 첫째는 고자로 타고났거나, 둘째는 의도적으로 고자가 되었거나, 셋째는 어떤 목적을 위해 스스로 고자가 된 경우를 언급하고 있다.
문제는 여기서 타고난 경우는 정작 첫번째, 그러니까 태어날 때부터 고자로 태어난 경우이고, 둘째와 셋째는 타고난 것이라기보다 어떤 의지나 결심으로 되는 경우로 보인다. 물론 세 경우 모두 생리적으로 거세된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에 결혼을 할 수 없는 불가피한 사정이긴 하다. 물론 세번째의 스스로 된 고자라는 말은 생리적으로 거세를 한 경우인지 아닌지는 불분명한데 어떻든 예수님은 이 세 경우에 한해서는 결혼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씀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결혼하지 않을 수 있는 성적 지향을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성경 원어와 영어 성경에서 어떻게 번역되었는지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성경 원어는 헬라어로 'εἰ μὴ οἷς δέδοται’ (알 호이스 데도타이)이다. 이 표현은 '오직 주어진 자들에게만’이라는 뜻으로, '타고난 자’라는 번역은 약간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어 보인다. 일단 원어상으로 이 표현은 결혼하지 않을 수 있는 성적 지향을 하나님께서 특별히 소명자에게 부여한 의미로 읽히고, 그래서 그들은 결혼을 하지 않고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 수 있는 사람들이다… 는 의미로 해석된다.
영어 성경에서는 이 표현을 대체로 다름과 같이 번역하고 있다.
- KJV: “but to them it is given”
- NIV: “except to those to whom it has been given”
- ESV: “but only those to whom it is given”
- The Message: “unless you’ve been given the gift”
우리말 개역개정에서 '타고난 자’로 번역한 말을 영어 성경들은 대체로 원어 상의 의미 그대로 ‘주어진 자’나 메시지 역에서처럼 '선물 받은 자’, 혹은 ‘은사’, ‘재능’을 부여받은 자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이는 결혼하지 않을 수 있는 성적 지향은 하나님의 은혜와 부름에 의해 주어진 것으로 해석한 것으로 '타고 난' 것으로 번역한 우리말 성경 개념과는 약간 뉘앙스가 다르다.
결국 이것은 결혼하지 않을 수 있는 성적 지향이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정하신 사람들에게만 주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사람들은 결혼을 하지 않고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 수 있는 사람들로,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라고 예수님은 말미에 덧붙인다.
말하자면, ‘타고난 자’의 개념은 결혼 문제에 있어서 인간적인 고집이나 선택에 의해 자제하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부름을 받고 은혜를 입어 믿음으로 응답함으로써 결혼을 자발적으로 포기한 자를 가리킨다. 이런 관점에서 공동번역에 따르면 ‘타고난 자’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사람’으로 번역한 것은 매우 역동적으로 대응한 해석이다.
그런데, 혹자는 마태복음 19장 11절의 예수님 말씀, 그러니까 타고난 사람은 결혼하지 않을 수 있다는 성적 지향에 대해서 긍정하는 입장을 표명하셨기 때문에, 동일한 논리로 예수님이 동성애를 긍정하는 근거도 될 수 있다는 입장인데, 무슨 말인가 하면, 예수님이 타고난 사람은 비혼을 고수할 수 있다는 성적 지향을 언급했기 때문에 동성애적 성적 지향을 타고난 사람도 동성애가 불가피한 것이 아니냐는 논리인 것이다.
그러나 이 논리는 우선 몇 가지 면에서 문제가 있다. 그 가장 첫째는 동성애는 유전적인 소인이 아니기 때문에 타고난 것이 아니라는 점이고, 둘째는 동성애는 외부적으로 영향을 받는 소인이 없지 않지만 본질적으로 내면의 욕구와 감정에 따르는 것이라는 점이다.
때문에 결혼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성적 지향으로서의 세 경우 모두 인간의 감정이나 욕구에 따른 것이 아니라, 선천적인 불가피성 혹은 소명을 받은 의지적 불가피성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동성애와 같이 감정이나 욕구를 따르는 성적 지향과는 다르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동성애라는 성적 지향은 욕망의 분출이지 불가피한 선택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우리 인간이 죄를 짓는 성향이 있다고 해서 죄를 마음대로 지어서는 안 되는 것과 같고, 성욕의 성향이 있다고 해서 아무하고나 성관계를 가져서는 안 되는 것과 같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19장에서 언급한 이런 비혼에 대한 성적 지향은 성경 원어 그대로 외부적으로 주어진 경우이고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소명으로 인해서 인간의 마음이 의지적으로 변화된 성적 지향이기 때문에 동성애적 성적 지향의 개념과는 분명히 다르다.
어디까지나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을 따뜻한 사랑으로 정죄치 않고 용서했지만, 다시는 그 행위를 하지 않도록 권면함으로써 간음 자체의 행위에 대해서는 정죄한 것처럼,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동성애자를 따뜻한 사랑으로 품는 분이시긴 하지만, 그렇다고 동성애 자체를 정죄치 아니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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