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마음을 가라앉히니 젖 뗀 아이가 어미 품에 있음 같도다. 나는 젖 뗀 아이처럼 만족합니다.(시편 131:2)
엄마가 아이에게 젖을 물릴 때를 상상해 보라. 그리고 그 엄마의 품 속에 있는 아이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시편 기자는 바로 엄마의 품에서 막 젖을 다 먹고 만족해 하는 모습을 사랑과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을 유의해 보라.
성찬이 점점 잊혀져 가는 예식이 되고 먹방이 유행하고, 맛집이 풍미하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성찬이야말로 우리가 우리 주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다시 경험할 수 있는 길이다. 로널드 롤하이저가 결혼한 부부에게 침소는 일상의 성찬이라고 했을 때의 감정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 황홀한 순간은 우리가 주님과 연합하는 경험이다. 그러나 그것은 세속적인 육욕의 절정이 아니라, 어린 아이가 젖 뗀 아이처럼 엄마 품속에서 느끼는 그 만족인 것이다.
주님은 왜 우리에게 세례와 성찬을 명하셨는가. 단 한 번의 세례와 반복되는 성찬.
이것은 단 한 번의 결혼과 반복되는 침소에서의 지속적 사랑을 보여주는 언약적 메커니즘이다. 결국 이 성찬이 작동하는 원리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몸과 혼과 영이 비밀스럽게 결합되는 있는 메커니즘이다. 그래서 인간의 몸은 도덕과 분리되지 않는다. 엄마의 품 속에서 평안을 느끼는 아이의 감정과 젖을 가진 엄마의 몸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몸이 물에 잠겼다가 다시 물 속에서 나오는 물리적 행위를 통해서 거듭남의 영적 경험을 결합시켜 놓으셨다. 동시에 생명을 탄생하는 생리적 메커니즘과 사랑을 결부시켜 놓으시지 않았는가. 그러나 동시에 이것은 위험천만한 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사람과의 언약 관계 바깥에서 생리적 메커니즘이 발동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성찬을 할 때, 분별없이 하는 것을 경계하지 않았는가.(고전 11:27, 29)
그렇다면 성찬만큼 래디컬한 의식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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