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그녀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니"(삼상 1:5)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흔히 기도의 어머니로 불리고 있다. 그러나 성경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누구든지 한나와 같은 상황에 처하면 기도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하나님은 한나에게 자식을 주지 않았다(삼상 1:5). 당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민이요, 언약 백성이었기 때문에 가문의 기업을 이어나가는 것이 장차 올 메시야를 대망하는 소원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래서 결혼한 히브리 여성이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경우는 기업의 단절이요, 하나님으로부터의 저주로 인식했기 때문에 그 당시에 불임의 여자는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상태에 처한 존재로 인식되었다. 게다가 한나는 자식을 낳지 못한 불행에 더하여 첩인 브닌나로부터 괄시까지 받았다. 당시에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것만 해도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었는데, 정실인 한나가 첩으로부터 괄시를 받았을 때는 아마도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분노를 경험했을 것이다. 이런 혹독한 정신적 시련과 고통을 당할 때, 기도의 자리에 나아가지 않고 그냥 잠자코 있을 그리스도인이 있겠는가. 만약 한나가 평소에 기도를 열심히 했던 여인이었다면, 오히려 하나님은 그녀에게 그런 고통을 주시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때문에 우리는 한나가 성전에서 술취한 듯이 기도한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녀가 엘리 제사장으로부터 술취한 사람으로 오해 받았을 때, 그녀는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심정이 통했을 뿐이라고 대답한다.
한나의 이 대답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한나는 자식이 없는데다 첩으로부터 괄시받는 비참한 상태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는데, 뜻밖에도 그녀는 기도 중에 자식을 낳으면 나실인으로 하나님께 바친다는 서원을 하지 않았던가. 도대체 한나의 기도 중에 어떤 일이 발생한 것일까. 그 해답은 바로 그녀가 기도 중에 하나님과 심정을 통했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한나는 자신의 신세 한탄을 넘어서 도대체 하나님과 어떤 심정이 통했다는 말일까.
이 당시는 소위 암흑기라고 할 수 있는 사사기의 말기였다. 블레셋의 침공으로 법궤마저 잃어버린 데서 암흑기의 절정에 도달한 때였다. 엘리 제사장의 며느리가 출산하면서 아이의 이름을 ‘이가봇’(영광이 떠남)이라고 지은 데서 그 시대의 정황을 잘 엿볼 수 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사기 시대 동안 줄곧 참 왕이었던 자신을 배반하고, 늘 자신들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여 그릇된 길로 빠지는 것을 근심하고 계셨던 것이다.
한나는 기도 중에 바로 이 하나님의 심정을 읽어낸 것이 아닐까. 기도의 시작은 자신의 신세 한탄이었지만, 기도의 끝에는 자신의 신세보다 더 무너져내리고 있는 하나님의 비통한 심정과 통하지 않았을까. 때문에 한나는 자신의 무자함을 풀고자 한 마음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킬 한 사람을 찾고 있다는 심정에 가 닿았던 것이 아닐까. 그리하여 드디어 한나는 "만약 하나님께서 저에게 자식을 주시면 이 아이를 하나님이 찾으시는 바로 그 인물로 쓰임 받도록 드리겠습니다."라는 고백을 토설한 것이 아닐까.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왜 한나는 그토록 갖고 싶어 한 자식을 나실인으로 하나님께 바친다는 비상식적인 맹세를 했으며, 또 기도 후에는 (아직 자식에 대한 응답을 받기도 전에) 그 얼굴에 수색(근심)이 사라졌을까.
바로 이 미스테리를 설명할 길은 단 하나의 담론만이 가능하다.
즉, 하나님은 이 암흑기를 마감시키기 위해 제사장 가문인 엘리 집안을 사용하여 사무엘의 출생을 준비하신 것이다. 사무엘은 장차 다윗을 왕으로 삼기 위해 기름부음을 시행하는 새 시대의 지도자가 되어야만 했다. 그리고 다윗의 후손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게 되므로, 그 다윗을 세우기 위한 중재적 인물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사무엘의 탄생을 위해 한나의 태를 닫으시는 것에서부터 첩인 브닌나의 멸시를 받도록 하기까지 혹독하게 다루시고, 드디어 그녀의 입으로 자식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하는 항서(서원)를 기어코 받아내신 것이 아닌가.
말하자면, 하나님은 사무엘이란 인물을 역사에 등장시켜 새로운 시대를 여시기 위해 비상 수단을 쓰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사소한 가족사가 성경에 기록될 리가 있겠는가.
우리는 한나의 기도에서 많은 기도의 교훈을 받으려 한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는 항상 우리가 기도의 자리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자리로 내몰려진다는 비밀을 알기까지 우리의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는 더 깊은 교훈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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