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골 4:6)
골로새서 4장에 기록된 위의 구절은 비그리스도인들에게 전도할 때의 언어 사용에 관한 사도 바울의 권면이다. 이 구절에서 특히 인상적인 것은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라고 한 대목이다. 일반적으로 소금은 음식의 맛을 내는 유용한 조미료일 뿐만 아니라, 부패를 방지하는 방부제 역할을 한다. 따라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말하라는 것은, 말에 재기가 넘치고 건전해야 한다는 상식적인 해석이 가능할 듯하다.
그런데, 이 구절에 대한 필립스의 사역(私譯) 성경은 좀 색다르게 번역하고 있다.
“Speak pleasantly to them, but never sentimentally, and learn how to give the proper answer to every questioner.”
그들에게 상냥하게 말하되, 결코 감상(感傷)에 빠지지는 마십시오. 그러면 그들이 어떤 질문을 해도 적절한 대답을 할 수 있는 법을 알게 될 것입니다.—골 4:6 필자 역
원어상의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라는 구절을 필립스는 감정을 절제하라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언뜻 보기에는 매우 엉뚱해 보이는 해석일 수 있지만, 자세히 고찰해 보면 매우 탁월한 통찰력을 보여주는 해석이다. 즉, 소금의 역할이 음식물의 맛을 내는 것이라고 할 때, 소금 그 자체는 음식물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나지 않는다. 소금은 어디까지나 자신을 녹여(희생하여) 음식물이 드러나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소금은 오직 음식이란 내용물에 봉사할 따름이다. 마찬가지로 언어는 말하는 사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살리는 방향으로 표현됨으로써 말하는 사람의 감정이 절제되어야 한다는 함의가 있는 해석이다.
이것은 특히 위의 구절의 문맥이 그러하듯, 비그리스도인에게 복음을 소개할 때 중요한 점이다. 우리는 전도할 때 복음의 사실을 분명하게 전달함으로써 복음의 내용이 훼손되지 않게 해야 한다. 그러나 많은 전도자들이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에 휩쓸려 무익한 변론에 빠지거나 공허한 추론으로 상대방을 설득하려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경우가 많다.
언어 사용의 일차적 목표는 의사전달이다. 따라서 의사 전달자는 먼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분명하고 명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전달자는 그 내용을 충실히 전달하기 위해서 나보다는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하여 최대한 진실하고 성실한 태도로 표현해야 한다. 상대방에게 감명을 주고자 하는 야망이나 환심을 사야겠다는 태도, 자신의 뜻을 주입시키고자 분주히 지껄이는 감정의 과잉은 소금의 숨은 역할과 같은 겸손함이 결여된 것이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전도자는 진리의 복음을 은혜 가운데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 말씀에 근거한 분명한 사실적 내용을, 설득하기보다 표현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설교의 경우에도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풀어내는 강해 설교의 중요성이 어느 때보다 강조되고 있다. 때로 설교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위주로 강해하기보다 성경의 특정 구절을 통해 자신의 신념이나 사상, 혹은 도덕적 교훈을 주로 전하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에는 설교자의 주관적인 감정이 개입될 여지가 많고, 또 메시지가 설교자의 일방적인 강요로 들려지게 되어, 설교를 통해 청중들이 공연히 희망고문을 당하는 경우가 일쑤다.
때문에 바울은 주의 종의 길을 가는 디모데에게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고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딤후 2:25-26)라는 교훈을 주고 있다. 베드로 사도도 이와 관련해서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 3:15)라고 말씀한다. 여기에서 ‘온유와 두려움으로’하라는 언급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대한 경외감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다. 성도는 비그리스도인에 대해 자기 철학을 주입하거나 자기 경험을 진리인 양 선전해서는 안 된다. 오직 진리의 말씀에 충실히 복종함으로써 성령의 인도를 받을 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감명이나 설득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복음이 확장되어 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단지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말과 행동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드려질 뿐이다. 인간의 혀가 아무리 뛰어나도 우리는 성령을 대신할 수 없다는 점에서 필립스의 언급처럼 감상에 빠지지 않는 절제된 언어 사용이야말로 말씀 그 자체에서 우러나오는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케 하는 것이다.
'성경인사이드아웃'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나는 '기도하는 어머니'의 대명사일까 (1) | 2020.05.13 |
---|---|
노예제도 속의 복음 (0) | 2020.04.24 |
산을 옮기는 믿음 (1) | 2019.11.03 |
성경은 노예제도를 옹호하는가 (0) | 2019.10.29 |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0) | 2019.10.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