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세에 ......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 (딤후 3:1-2)
복음송 가운데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란 찬양은 기독교계 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 가요계에서도 이 곡을 리메이크하여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노래로 꼽힌다. 이 노랫말은 언뜻 보면 매우 아름다워 보인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재는 소중한 존재이고, 또 남을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 자체가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 일인가. 그래서 우리는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또 내 몸처럼 남을 사랑하라는 성경 말씀은 인간을 외적 조건으로만 판단하는 세태에 많은 울림을 준다.
그러나, 우리가 남을 사랑한다는 것과 자기 자신을 사랑한다는 말은 다르다.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매우 소중한 존재인 것은 맞지만, 우리 인간 편에서는 모두 스스로를 돌아볼 땐, 매우 형편없는 존재이다. 물론, 인간이 자신의 죄된 실존을 비관하고 열등감에 빠지는 것은 좋지 않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죄된 실존을 무시하고 자신은 당연히 사랑받아야만 하는 존재라고 여기는 것 또한 잘못된 생각이다. 그래서 성경은 말세에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한다는 경고를 함께 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란 말은 자칫 우리에게 인간의 죄된 실존, 곧 자신의 무능과 게으름과 책임을 무시하고 무조건 사랑을 받아야만 하는 존재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만약 이 노랫말이 우리가 우리 자신의 형편 없음을 깨닫고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반전의 계기로 삼는다는 의미로 해석한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이 노랫말은 ‘자존감’(self-esteem)과 ‘자신감’(confidence)을 혼동한 워딩으로 보인다.
이것은 기독교적 관점에서 중요한 포인트다.
자신감은 노력으로 얻는 것이지만, 자존감은 근거 없는 자신감(일종의 나르시시즘)이기 때문에 인격 형성과 자기 성숙(발전)에 장애가 된다. 자신에 대한 과도한 불안감이나 의심도 문제이지만, 최소한 이런 것은 더 나은 자신을 위해 노력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실존을 무시한 자존감은, 무턱대고 자신을 높이기 때문에 자신의 발전을 가로막을 뿐 아니라, 자아의 분열을 초래하거나 스스로 위선적인 이중 인격자가 될 공산이 크다.
세계적인 K-POP 스타가 된 방탄소년단(BTS) 노래 가운데도 “Love myself”라는 곡이 있다. 이 노래말은 화자가 거울을 들여다보며 거울 속의 나를 2인칭으로 놓고 대화하듯 말하는 가사이다.
“내 안에 서툰 내가 있지만….. 왜 자꾸만 감추려고만 해 니 가면 속으로, 내 실수로 생긴 흉터까지 다 내 별자린데……”
이 노랫말들을 자세히 보면 자신의 부족함에 대한 성찰보다 존재 자체에 대한 무조건적인(포스트모던적인) 긍정으로 가득 찬, 거울 속의 자신의 모습에 도취해 가는 전형적인 나르시시즘을 보여주고 있다.
권위와 책임이 실종된 현대 사회의 모습 속에는 이런 류의 혼동을 자주 볼 수 있다. 흔히 우리는 어른들이 아이들의 눈높이로 말해라고 충고하는 소리를 듣고 있지만, 실제로 아이들과 눈을 맞추고 막무가내로 그들을 치켜세워주는 것은 아이들에게 그릇된 자존감을 심어주는 일이다. 오히려 부모는 권위를 가지고 아이가 올려다보도록 해야 한다.
만약 아이들을 눈높이로 늘상 대하면, 아이들은 자신이 마치 왕자나 공주가 된 듯한 착각 속에 성장하게 된다. 말하자면, 그릇된 자존감 속에서 결국 실패자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다. 오늘날 많은 부모나 선생이 아이들의 눈높이로 친절하게 아이들을 달래듯이 설명해 주는 것이 아동의 인격을 보장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우리 옛말에도 "오냐 오냐 키우면 할아버지 수염도 뽑는다"는 말이 있듯이, 아직 분별력이 부족한 아이들에게 어른들이 권위를 내던지고 그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그들의 요구와 행동을 일일이 설명해 주는 방식은 아이들로 하여금 버릇없는 논쟁과 일탈만 야기시킬 뿐이다. 물론 우리는 아이들을 사랑으로 대하여야 하지만, 진정한 사랑에는 책임이 동반되는 것이기 때문에 아직 성인에 이르지 않은 아이들에게 부모나 선생의 권위 있는 지도와 훈육을 소홀히 하면 결코 바른 성장을 기대할 수 없다.
다윗이 왜 자식 교육에 실패했는가. 그의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켜 그의 권좌를 탈취하려 한 그 동기가 실제로는 아주 사소한 한 사건에서 발단되었다는 것을 알면 모두 놀랄 것이다. 그것은 바로, 다윗의 아들 암논이 이복형제 압살롬의 여동생을 욕보인 후에 내쳐버린 사건에서 아버지로서의 다윗이 보여준 미온적인 태도 때문이었다.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이 자신의 여동생을 욕보인 암논을 율법에 따라 처벌하지 않고 그냥 큰소리로 한번 노하기만 한 그 태도(삼하 13:21)에 불만을 품고 결국 암논을 살해하는 끔찍한 형제 간의 비극을 만들어내면서 아버지를 반역하는 단초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자녀들은 부모의 적절한 규율을 통한 훈육으로 부모에게 순종하는 법을 배움으로써 바르게 성장하고 행복하게 된다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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