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개혁이란 화두에서 시작해 보자.
검찰개혁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검찰이 외압에 영향을 받지 않고 오로지 법과 원칙에 따른 수사를 할 수 있는 독립 및 중립성이다. 둘째는 과도한 검찰권을 분산하고 여러 견제 장치를 통해 검찰의 갑질을 줄이고 인권을 존중하는 수사를 하도록 하는 것이다. 전자는 법과 원칙을 고수하는 인물에게 검찰권을 맡기는 인사를 통해서 실현할 수 있고, 후자는 법과 제도 개선을 통해서 실현할 수 있다.
그래서 현 정권은 과거 박근혜 정권의 적폐를 수사하여 탄핵하는데 일등공신 역할을 한 윤석열을 검찰총장에 임명했다. 왜냐하면, 문재인 정권은 윤석열이 박근혜 정권의 적폐를 수사하는데 어떤 외압에도 굴하지 않고 오로지 법과 원칙에 따라 중립적으로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것을 통해 검찰 개혁의 모범적인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말하자면, 문재인 정권은 윤석열이 검찰개혁의 첫번째 요소, 그러니까 살아 있는 권력에도 눈치 보지 않고 수사했던 과거의 전례를 통해 검찰의 중립성과 독립성을 충족시킬 수 있는 적임자로 본 것이다. 그리고 둘째의 검찰개혁 과제는 제도 개선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윤석열 취임 이후에 검경수사권 조정이라든지, 검찰의 수사나 기소의 관행을 바로잡는 제도상의 개혁을 점진적으로 실천해 나가는 과정에 있었다. 그래서, 최순실 수사 때와는 다르게 조국 전 법무부장관의 수사 때, 포토라인을 없애고 검찰의 수사 과정 브리핑을 없애는 등의 확연히 달라진 수사 관행을 실제로 보여주기도 했다.
그런데, 바로 이런 검찰개혁의 최적임자라고 칭찬하며 임명했던 윤석열을 갑자기 문재인 정권은 돌변하여 검찰개혁의 걸림돌이라고 찍어내기를 하고 나섰다. 그 이유는 누가 봐도 딱 한 가지이다. 윤석열이 현 정권의 살아 있는 권력 비리를 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법과 원칙대로 외압에 굴하지 않고 수사하는 모범적인 검찰개혁의 수장이 도리어 검찰개혁의 걸림돌이라니… 말하자면, 검찰개혁을 부르짖는 사람들이 철저히 반검찰개혁적인 짓을 벌이는 아이러니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이런 어처구니 없는 만행을 저지르는 정권을 진보 정권이라고 네이밍하는 데 있다. 많은 한국 사람들이 아직도 문재인 정권을 진보 정권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의 뇌리 속에는 여전히 현재 한국 사회는 진보와 보수가 심하게 갈등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단언컨대, 한국에 진정한 진보정당이 있었던 적은 없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 모든 정당은 모두 보수를 기반으로 하여 부분적으로 진보적인 색채를 가미했을 뿐이고, 순수한 진보를 표방한 정당은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오히려 1987 민주화 체제 이후부터는 좌파적 정당과 우파적 정당 간의 대립과 반목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한 한국 사회의 진단이 되리라 본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진보이고 무엇이 보수인가.
보수는 과거의 집적된 지식과 지혜를 존중하고 그것을 바탕하는 생각이다. 이를테면, 대표적인 보수적 직종은 법조인들과 교사들이다. 왜냐하면, 사법부의 판단에 준거가 되는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과거의 판례이고,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대부분은 과거의 집적된 지식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판사나 교사는 모두 과거의 지식이 없이는 불가능한 보수의 수호자들인 셈이다.
그러나 시대가 변함에 따라 과거의 판례도 변경될 수 있고, 또 과거의 집적된 지식도 새로운 시대에 부응해야 할 필요가 있다. 때문에 과거의 지식 속에 파묻혀 안주하는 보수는 소위 수구꼴통이 되지만, 새로운 시대에 부응하는 변화를 도출해 낸다면 그것은 진보가 된다. 그런 점에서 진보는 바로 보수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보수는 항상 그런 진보를 만들어내는 못자리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과거의 모든 보수적 가치를 무시하고 어떤 변화를 만들어내려고 한다면 그것은 혁명이 된다. 물론 과거의 집적된 악습과 폐단을 모조리 끊고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혁명이 가끔 역사에서 유효하게 성공한 적이 없지 않지만, 대개 역사적으로 혁명이 성공적으로 안착된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왜냐하면, 과거의 지혜와 지식을 모조리 무시하는 혁명은 결코 새로운 사회의 안정을 이루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의 집적된 가치들을 온존시키면서 새로운 변화를 일구어내는 것을 우리는 개혁이라고 부르고, 실제로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 되어 온 것은 바로 이런 개혁의 결과들이다. 그리고 이런 개혁을 통해서 역사는 진보해 가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보수나 진보 개념은 세상을 향한 도전과 응전의 태도이기 때문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느 사회이건 혼재된 개념이고 뚜렷한 정파적 구분을 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지금 한국 사회는 진보와 보수가 대립하고 갈등한다고 말하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오히려 지금 한국 사회는 구체적인 정책 면에서 자본주의적 체제를 옹호하느냐, 아니면 자본주의에 대해서 비판적 성향과 정책을 펴느냐는 관점에서는 뚜렷한 차이들이 있고, 또 공산주의 체제인 북한에 대한 친북 성향과 반공 성향이 대립한다는 점에서 우파와 좌파 간에 갈등하고 있다는 말이 더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를 진보와 보수라는 이분법적 개념으로 가름하는 데 익숙해져 있는 이유는, 해방 이후부터 줄기차게 이어져 내려온 좌파 사회주의적 성향의 세력이 만들어 놓은 계급투쟁의 이분법적 선동 프레임 때문이다. 이를테면, 민족과 반민족, 항일과 친일, 주체와 사대, 공동체와 개인, 민족자본과 매판자본, 서민과 재벌 등, 흑백논리로 편가름해서 어느 편에 설 것인가를 강요하면 누구도 반대 논리를 들이댈 수 없는 처지에 빠져버린다. 지금 북한 주민들이 세계에서 가장 비참한 삶에 빠져 있지만, 자신들이 내걸고 있는 민족, 항일, 주체와 같은 구호에 빠져 오히려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박탈 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바로 이 이분법적 프레임 속에 진보와 보수도 함께 끼어 들어가 있기 때문에, 많은 한국인들이 진보는 마치 항일 민족 세력이고 주체적인 인민 대중의 편으로 좋은 것이고, 보수는 무조건 기득권을 사수하고 변화를 거부하는 친일 반민족 적폐 집단이라는 잠재 의식이 깔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진보와 보수는 실제 역사 과정 속에서는 함께 가는 동반자적 관계이지 이분법적 편가름으로 나눌 수는 없다. 물론 보수 가운데, 기득권에 안주하는 소위 웰빙 보수가 없진 않다. 또 변화를 싫어하는 수구꼴통의 보수도 있다. 하지만, 수구꼴통은 소위 우파 보수 집단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마치 독재체제가 히틀러 같은 우파 뿐만 아니라, 스탈린 같은 좌파 독재가 존재했던 것처럼, 지금 한국 사회의 수구꼴통 세력은 과거의 보수 세력이 아니라, 현 집권 세력이다. 말하자면, 지금은 소위 좌파적 수구꼴통들이 판을 치고 있지 않는가. 공수처를 만들고 윤석열을 찍어내는 문재인 정권, 귀족노조, 탈원전 정책으로 등장한 태양광 마피아 집단, 라임과 옵티머스, 신라젠 같은 금융사기 세력, 조국류의 강남좌파 등 말이다.
이래도 한국 사회가 진보와 보수의 갈등이라고 말할 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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