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 철학자 루드비히 미제스는 "자유주의를 반대하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방법은 없다. 만약 있다면, 그것은 신앙이거나 심리적 노이로제로만 가능하다"고 했는데, 바로 자유주의에 도전하는 사회주의가 역사적으로 실패했음에도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 이유야 말로 그런 심리적 노이로제라는 기제로 설명할 수 있다.
그 첫째는 인간의 시기심 때문이다.
사실, 100년 전보다 인류는 전반적으로 잘 사는 사회가 되고 빈부격차도 줄었다. 그리고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 체제는 그런 부를 창출하여 많은 두터운 중산층을 만들어내었다. 최근에는 인도와 중국에서 시장 경제 덕분에 대규모 중산층 그룹이 생기면서 지구는 과거보다 더 평평해 져 가고 있다. 그러나 전근대 시대의 빈부격차는 신분의 차이로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에 지금보다 더 못살았어도 신분의 굴레를 운명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부자에 대한 시기심이 발동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신분제가 철폐된 근대 자유 국가에서는 경제적으로 비교적 잘 사는 중산층조차 상류층에 대한 시기심이 상대적으로 더 강해졌다. 이를테면, 삼성전자의 계열사에 대한 원가후려치기로 중소기업들을 못살게 군다고 언론에서 비판을 쏟아내면서, 동시에 영업이익이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고 하면 마치 그 이익을 모두 삼성전자의 CEO가 다 가져가는 줄 알고, 재벌에 대한 반감은 고조된다. 대체로 이런 선동은 겉으로는 정의와 평등이란 도덕적 외피를 입고 있기 때문에, 비록 강렬한 시기심으로 추동되어 경제적 하향 평준화를 시킬지라도, 적을 끌어내리기만 하면 행복을 느끼는 이런 심리적 노이로제가 사회주의를 꿈꾸게 하는 것이다.
둘째는 죄책감을 덜어주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이고 불완전한 존재다. 때문에 세상에 살면서 죄책감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끊임없이 죄책감에 대한 무거운 짐과 책임 때문에 불행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사회주의는 이런 개인의 불완전과 잘못들을 사회의 구조적 악으로 돌리고 많은 부분에서 개인들로 하여금 죄책감에서 해방되게 하기 때문에, 사회주의 체제는 추상적으로 죄책에서 해방된 공동체 안으로 익명의 존재들이 공존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준다.
셋째는 책임을 지기 싫어하는 심리 때문이다.
사회주의는 개인이 책임져야 할 일들을 국가라는 기관에서 일일이 배정해 주고, 간섭하게 된다. 때문에 개인들은 끊임없이 순간순간 자기 결정의 부담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경쟁에서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인간의 심리를 충족시킨다. 그래서 이런 사회주의 체제는 필연적으로 소수의 엘리트 독재가 군중을 통제하는 체제로 갈 수밖에 없고, 게다가 인간 세상에 경쟁이 사라지면 개인들은 본성적으로 나태와 게으름으로 빠진다.
이런 세 가지 심리적 기제는 인간의 행동을 그릇되게 만드는 노이로제 현상이다. 때문에 사회주의를 열망하는 자들은 그 심리적 동인에 이끌려 기꺼이 정치적 운동에 투신하게 되는데, 겉으로는 정의와 평화를 내세우지만 내면엔 계급적 적대감과 계층간 차이를 깨뜨리려는 호도된 사명감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이러한 심리는 곧 소수의 엘리트 계급이 선동적으로 주도하고 소위 인민 대중이 일사불란하게 호응하는 정치적 메커니즘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사회주의 운동이 쉽게 전체주의적 양상을 띠는 이유이다. 결국, 사회주의가 이런 그릇된 심리적 노이로제에 기인한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불행을 만들어내는 매우 슬픈 일이지만, 한국 사람들도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을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남이 잘 되는 것을 시기하는 심리에 부추기면 어쩔 수 없이 개 돼지(?) 꼴이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마도 설사 대한민국이 문재인 정권에 의해 경제적으로 폭망할지라도, 인간의 시기심이 존재하는 한, 또한 게으름과 나태에 익숙한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여전히 사회주의에 대한 열망은 가시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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